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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

죽음과 나

죽음(Death)


0. 생각보다 죽음은 우리 곁에 가까이 존재한다.

당신은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한다.

주변을 둘러만 봐도 그것이 호상(好喪)이든 갑작스러운 죽음이든 간에 심심치 않게 상가(喪家)를 방문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전국의 수많은 장례식장이 망하지 않고 잘 유지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얼마 되지 않는 지난 세월호 사건에서의 학생들의 죽음,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국경에 위치한 가자지구에서의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 등이 있다. 실제로 그 상황에 처하지 않고서는 느끼지 못하는 그야말로 엄청난 학살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죽음들이다. 그네들 중 누가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고 생각해보았을까. 죽음은 생각하기 싫고 꺼리는 표상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면할 수도 없는 우리 곁에 무척이나 가까이 있는 존재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승사자들은 누군가를 데려가기 위해서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곳이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든 평범한 일상이든 가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죽음이란 것에 대해서 이제는 적어도 한 번 쯤은 진지하게 생각하고 고민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1. 죽음, 두렵거나 혹은 궁금하거나

웰다잉(Well-dying)’, ‘슈카쓰(終活: 인생을 정리하는 활동)’

한국과 일본을 비롯하여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행동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련의 현상이다.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서 조금씩 생각을 해보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표현하자면 이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양이다. 오히려 죽음을 담대하게 받아들이고 죽음에 이르기 전의 마지막을 마무리하는 데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다. 남들에게 쿨하게(?) 보이려는 척인 행동일 뿐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인간의 본성, 본능인 살고자 하는 의지에 비추어 볼 때, 아직도 두렵거나 혹은 미지의 궁금한 세계이다. 모든 권력을 가졌었던 진시황제나 우리나 모두 불로장생을 원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지 않을까.

가톨릭을 믿고 있기는 하지만 사후 세계에 대해서는 어렸을 적부터 어떨지에 대한 막연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어왔다. 그냥 일상 속, 버스를 타고 가던 와중에(그 당시는 초등학교 시절로 기억하는데 왜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어갔는지는 스스로도 잘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다만, 먼저 하늘나라로 가신 아버지 때문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생각했던 것은 별거는 아니었지만 죽고 나서 나는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천당과 지옥, 연옥, 부활 등에 대해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으므로 그것이 과연 사실일까? 에서부터 시작해서 그렇다면 이미 먼저 간 사람들은 어디에 가 있을지에 대한 걱정에 이르기까지 궁금증은 꼬리에 꼬리를 이어지고는 했다. 불사신이 아닌 이상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아마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죽고 나서야 알 수 있을 것이긴 하지만 가끔가다 문뜩 생각에 잠기고는 한다.

 

2. 죽음이 무서운 이유는?

누구나 겪는 죽음이라면 왜 그렇게 사람들은 죽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할까?

죽은 뒤에 대해서 아무런 알려진 정보가 없으니 그럴 법도 하지만 제일 큰 이유는 이별이 아닐까 한다. 현재 이생에서 맺은 수많은 인연들, 가족, 친구, 사랑하는 사람, 이 세계 자체에 이르기까지 이들과 헤어짐을 강요하는 죽음이기 때문에 그래서 더 꼴 보기가 싫어질 수도 있다. 그렇기에 아쉽지 않은 죽음은 없을 것이다. 지나온 과거는 과거대로 후회를 남길 것이며 죽음으로써 잃게 되는 미래의 시간 또한 겪지 못함으로써 아쉬움을 선사할 뿐이다. 죽기 전에 후회 없이 죽을 수 있도록 살자는 마음이 누군들 없겠느냐 만은 그렇게 살기가 쉬우면 사람들은 어쩌면 죽음을 두려워 안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삶은 매 번 선택의 갈림길에 처하게 되고 그 선택에 따른 책임과 후회를 남긴다.

유일하게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세상, 세계, 사람들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이 없는 사람들일 것이며 보통 그들이 마주하는 죽음은 삶의 끝자락에서 선택하는 마지막 선택지에 하나가 되고는 한다. 물론 그 사람과 상황에 처해보지 않고서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설명하기는 어렵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

[출처:flickr.com/photos/lidocaineus/8028899383/in/photostream]

 


3. 자살, 이기적인 자기결정권, 관계성의 소멸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죽음의 길로 들어서는 행위는 개인적으로 어떠한 이유를 막론하고 옳지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자살(suicide, 自殺)이야말로 이기적인 자기결정권을 내세우는 것과 다름없다. 고등학교 시절 은사님께서 말씀하시길 아무리 죽고 싶은 상황에 처하더라도 자신보다 더 못한 사람이 세계 곳곳 어딘가에는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하셨다. 무엇보다도 그런 사람들이 삶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자살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뛰어내린다는 오명을 쓴 마포대교의 생명의 다리에는 여러 글귀가 써져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라는 문구이다. 이처럼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위치하고 있다. 나 자신은 아쉬움이 없을지는 몰라도 그 사람과 관계된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낯이라도 있다면 그러한 독단적인 결정에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이는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것만이 아닌 모든 관계성의 소멸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마지막 최후의 결정을 내렸을 그들을 향해 무조건 적인 비난을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비판은 필요하다. 죽음이 아무리 최후의 선택이라고 할지라도 죽음을 선택해버리는 순간, 그 결정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4. 죽음과 나, 그리고 유언(Ending Note)

갑작스럽게 어느 순간 죽음이란 놈과 직면하게 될지, 혹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순간에 예고하고 죽음과의 약속을 잡을지는 모르겠다. 죽음이란 놈은 그렇게 쉬운 놈이 아니다. 그렇지만 어차피 죽음이란 놈도 언젠가는 마주치게 될 터인데 미리미리 준비해놓는다고 해서 해()가 되지는 않으리라.

 

내가 남기는 유언(Ending Note)”

아마 어렸을 때부터 죽음과 관련하여 궁금해 했던 것에 대한 답을 지금쯤에는 얻었을까나.

이 세상과의 작별을 고할 때 가장 아쉬운 점은 사람들과의 이별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전 살아있을 때에도 다른 사람이 죽었을 때, 꼭 마지막을 함께하며 그 아쉬움을 상가에 꼭 들려 풀었던 듯싶네요. 어떠한 인연이었던 간에 한 순간이라도 나의 인생에서 함께 한 사람들이 저의 마지막을 위해 찾아와준다면 꼭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습니다. 제가 생각 외로 기억력이 좋아서 웬만해서는 사람들과의 추억은 잘 안 잊어먹기에(혹여나 내가 살아있을 때 속칭 쌩깐 적이 있다면 그건 먼저 쌩을 당해서 그랬거나 타이밍을 놓쳐서 그랬을 겁니다! 나쁜 의도는 없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네요) 한 사람 한 사람 다 지켜볼 예정이니 걱정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안 친했다 하더라도 여기까지 온 거면 나를 생각해준 것이기에 친한 거지요!

이 순간만이라도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기에 소박하면서도 유쾌한 장례식을 치러주시면 좋을 것 같네요. 영상으로 찍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영화 러브 액츄얼리(Love Actually, 2003) ’ 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안에서 나오는 장례식이 꽤 인상 깊었습니다. 무조건 조용하고 엄숙하기보다는 소소한 웃음이 흘러나오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아마 영상 찍거나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 크게 어렵지는 않을 듯싶습니다.(제가 다 부탁해놓고 갈게요) 혹은 제가 찍힌 영상들을 장례식 동안에 틀어놓는 것은 어떨까요? 여러 버전을 만들어서 오는 사람마다 다양한 저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말이지요. RT2-30분이 적당하겠죠? 좀 더 짧아도 되고요.(가는 마당에 간섭이 좀 많은 줄은 알긴 합니다. 그래도 여행가고 혼자서 라면 먹고 돌아다니는 등의 여러 영상들이 많으니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내가 살던 세상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놓겠다는 결심, 목표를 이루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찌됐든 간에 이곳에 오신 분들이 저에 대해 그나마 제일 잘 아시는 사람들일 테니 냉정히 평가해주세요. 평가 결과로 목표를 달성한 것으로 여러 사람들이 본다면 묘비명은 이럴수가로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웃음) 죽은 마당에 말이 참 많은 것 같네요. 그래도 가끔 제 생각이 나면 불러주시길 바랍니다. 시끄러운 술자리이든, 엄숙한 회의 자리이든 간에 어디든 찾아가겠습니다. 저에게는 잊혀 질 권리 따위 필요치 않으니까요.

그래도 무엇보다도 싫은 건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이제 제게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누구의 죽음도 마찬가지겠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미래의 시간을 더 이상 가질 수 없다는 것이 개개인에게는 제일 안타까운 것이겠지요. 아쉽지 않은 죽음은 없을 것입니다. 그 아쉬움을 줄이고자 했던 이번 생애를 뒤로하고 이제는 진정 떠나고자 합니다. 넌 어디서든 잘하고 적응할 거야라는 믿음에 보답하고자 전 오늘도, 죽어서도 달려 나갑니다. 할 말이 많지만 이 한마디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사랑하고, 만나서 즐거웠고, 한번 뿐인 인생, 이럴수가, 아주 잘 놀다 갑니다! See you soon”

 

 

+@. 죽음의 무도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중세 시대의 사람들의 마음이 담긴 곡.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두려우시다면 김연아 선수의 프로그램 곡으로도 쓰였던 죽음의 무도를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죽음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삶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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